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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하 금지법: 도시 재난의 해법인가, 주거 취약층의 덫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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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여름, 서울을 집어삼킨 기록적인 폭우는 단순한 기상 이변을 넘어 우리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고리를 수면 위로 드러냈습니다. 바로 '반지하'라는 주거 형태가 가진 비극적 현실입니다. 참혹한 인명 피해 이후, 정치권은 서둘러 '반지하 주거 금지'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습니다. 언뜻 보면 인권과 안전을 위한 당연한 조치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정책이 과연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선의로 포장된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 될 수 있을까요?

이 글은 반지하 금지법이라는 정책을 단순한 찬반의 이분법을 넘어, 도시 구조, 주거 불평등, 그리고 기후 위기라는 거대한 맥락 속에서 다층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정책의 명분 뒤에 가려진 복잡한 현실과 그것이 주거 취약층에게 미칠 파급 효과, 그리고 우리가 진정으로 모색해야 할 대안은 무엇인지 함께 탐구해보고자 합니다.

Key Takeaways

  • 증상 치료의 한계: 반지하 금지법은 재난의 '결과'에 집중한 반응적 조치일 뿐, 기후 위기에 대응하지 못하는 도시 인프라라는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 주거 사다리 걷어차기: 저렴한 주거 옵션인 반지하를 일괄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가용한 선택지가 거의 없는 주거 취약층의 마지막 주거 사다리를 걷어차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 통합적 접근의 필요성: 진정한 해결책은 금지가 아닌 관리와 전환에 있습니다. 도시 인프라 개선, 공공임대주택 확충, 기존 반지하 주택의 안전 강화 등 다각적인 정책 조합이 시급합니다.

논의의 시작점: '건축법 개정안'의 명분과 현실

'반지하 금지법'으로 불리는 정책의 정식 명칭은 '건축법 개정안'입니다. 핵심 내용은 지하층이나 반지하층을 사람이 거주하는 용도로 사용할 수 없도록 원칙적으로 불허하는 것입니다. 이미 존재하는 반지하 주택에 대해서는 20년가량의 유예기간을 두어 점진적으로 비주거용으로 전환하도록 유도하겠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이 법안의 명분은 명확합니다.

  1. 재난 안전 확보: 집중호우 시 침수 위험으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
  2. 주거 환경 개선: 채광, 환기, 습도 등 열악한 환경에 노출된 거주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

누구도 이 명분에 반박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도시, 특히 서울의 주거 현실이 이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전국의 반지하 가구는 약 32만 7천 가구에 달하며, 그중 60% 이상인 약 20만 가구가 서울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들에게 반지하는 '선호'의 대상이 아니라, 살인적인 주거비를 감당하며 직장과의 접근성을 유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지'입니다.

선의의 역설: 왜 단순한 '금지'는 위험한가?

사용자께서 지적하신 "최저임금 받는 직업을 없애버리는 최저임금 직업 금지법"이라는 비유는 이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꿰뚫고 있습니다. 반지하를 없앤다고 해서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지상의 쾌적한 아파트로 이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열악한 환경으로 내몰릴 가능성이 큽니다.

사례 연구: 2022년 신림동 반지하 참사와 정책의 탄생

2022년 8월, 관악구 신림동의 한 다세대주택 반지하에 살던 일가족이 불어난 물을 피하지 못해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여론을 들끓게 했고, 서울시는 즉각 '반지하 주택 퇴출'을 선언했습니다. 이는 분명 재난에 대한 책임 있는 공공의 반응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접근법의 문제는 문제의 대상을 '반지하 주택'이라는 공간 자체로 한정했다는 점입니다. 왜 그들은 반지하에 살아야만 했을까요? 왜 도시의 배수 시스템은 기후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을까요?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 대신, '반지하'라는 가시적인 대상을 제거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손쉬운 길을 택한 것입니다. 이는 책임의 전가이며,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포퓰리즘적 정책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정책 이해관계자 분석: 각자의 셈법

반지하 금지 정책은 여러 이해관계자에게 각기 다른 영향을 미칩니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해관계자 정책으로 인한 기대 효과 (Pros) 정책으로 인한 우려 및 비용 (Cons)
반지하 세입자 장기적으로 더 나은 주거 환경으로 이동 가능성 단기적 주거 상실, 주거비 상승, 출퇴근 거리 증가, 옥탑방/고시원 등 더 열악한 환경으로의 전락 위험
반지하 임대인 비주거용 전환 시 용도 변경에 따른 가치 상승 가능성 임대 수입 상실, 용도 변경에 드는 막대한 비용, 공실 장기화
정부/지자체 '안전 도시'라는 정책적 성과 홍보, 재난 책임 일부 해소 이주 대책 마련을 위한 막대한 재정 부담, 정책 실패 시 정치적 책임
사회 전체 도시 미관 개선, 장기적 주거 환경의 질적 향상 주거 불평등 심화, 젠트리피케이션 가속화, 사회적 갈등 증폭

이 표에서 명확히 드러나듯, 정책의 가장 큰 비용과 고통은 가장 취약한 계층인 '세입자'에게 집중됩니다.

 

 

도시 인프라와 기후 위기: 진짜 범인은 누구인가?

이번 참사의 근본 원인은 '반지하'라는 주거 형태가 아니라, 기후 위기 시대에 걸맞지 않는 낡은 도시 인프라입니다. 서울은 급격한 도시화 과정에서 불투수 면적이 넓어졌고, 기존의 하수관로 용량은 시간당 75~85mm의 강수량을 감당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2022년 당시 동작구에는 시간당 141.5mm라는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문제의 본질이 인프라에 있다면, 해결책 역시 그곳에서 찾아야 합니다. 대심도 빗물터널 건설, 빗물 저류조 확충, 스마트 하수관망 시스템 도입 등 도시의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높이는 데 투자를 집중해야 합니다. 반지하를 없애는 것은, 물이 새는 배의 바닥에 구멍을 막는 대신, 가장 낮은 칸의 승객들을 쫓아내는 것과 같습니다.

정책적 딜레마와 대안적 상상력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요? '금지'라는 극단적 처방 대신, 다음과 같은 다층적 접근이 필요합니다.

  1. 선별적·점진적 전환: 모든 반지하를 일괄 퇴출하는 대신, 침수 위험도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고위험 지역부터 공공이 매입하여 커뮤니티 시설이나 창고 등 비주거용으로 전환하는 '연착륙' 전략이 필요합니다. LH의 '매입임대주택' 사업을 반지하에 집중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2. 안전 장치 의무화 및 지원: 유예기간 동안 거주가 불가피한 반지하 주택에 대해서는 차수판(물막이판), 개폐식 방범창, 침수 경보기 설치를 의무화하고, 설치 비용을 정부와 임대인이 분담하도록 지원해야 합니다.
  3. 주거 바우처 현실화: 반지하를 떠나는 세입자에게 단순히 이주비를 지원하는 것을 넘어, 지상층 주택의 임대료 차액을 감당할 수 있도록 주거 바우처(주택수당)를 현실적인 수준으로 대폭 확대해야 합니다.
  4. 다양한 형태의 저렴한 주택 공급: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결국 저렴한 공공임대주택의 공급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것입니다. 도심 역세권에 청년과 1~2인 가구를 위한 소형 공공임대주택을 집중적으로 공급하여 반지하의 수요를 흡수해야 합니다.

결론: 도시의 포용력을 묻다

반지하 금지법은 '안전'이라는숭고한 가치를 내세우지만, 그 실행 방식은 도시의 가장 약한 구성원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 수 있는 위험한 발상입니다. 재난의 책임을 개인의 주거 형태에 떠넘기고, 구조적 문제를 외면하는 정책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던져야 할 질문은 '어떻게 반지하를 없앨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반지하에 살지 않아도 되는 도시를 만들 것인가?'입니다. 이는 곧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강력한 인프라, 충분한 양의 저렴한 공공주택, 그리고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촘촘한 사회 안전망을 갖춘 도시를 향한 질문입니다. 반지하를 지우기 전에, 우리 사회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먼저 지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할 때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여러분의 고견은 어떠신가요? 반지하 금지법이 가진 또 다른 맹점이나, 제가 제시한 대안 외에 더 나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댓글을 통해 더 깊은 논의를 이어가고 싶습니다.


FAQ (예상 질문 및 답변)

Q1: 반지하 임대인(집주인)의 재산권 침해 문제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A: 매우 중요한 지점입니다. 임대인 역시 이 정책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강제적인 금지보다는 인센티브 기반의 자발적 전환을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예를 들어, 반지하를 비주거용(창고, 작업실, 커뮤니티 공간 등)으로 용도 변경할 시 용적률 상향, 세금 감면, 리모델링 비용 저리 융자 등의 혜택을 제공하여 임대인이 손해를 보지 않고 정책에 협조할 수 있는 출구를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Q2: 해외에도 반지하와 유사한 주거 형태에 대한 규제 사례가 있나요?
A: 네,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 뉴욕이나 캐나다 토론토 같은 대도시에는 '베이스먼트 아파트(Basement Apartment)'가 존재합니다. 이들 도시는 전면 금지보다는 엄격한 안전 규제를 적용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예를 들어, 별도의 출입구 확보, 일정 크기 이상의 창문 설치(비상 탈출 및 채광 목적), 화재경보기 및 환기시설 의무화 등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해야만 합법적인 주거 공간으로 인정합니다. 이는 '금지'가 아닌 '관리'를 통해 주거의 질과 안전을 확보하려는 접근법으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Q3: 법안에 20년이라는 긴 유예기간이 있는데, 그동안 대책을 마련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A: 20년이라는 기간은 언뜻 길어 보이지만, 구체적인 실행 계획과 재정 확보 방안이 없다면 허울뿐인 시간에 불과합니다. 당장 이주 대책이 없는 세입자들은 불안에 떨어야 하고, 임대인들은 자산 가치 하락을 우려해 주택 개보수를 꺼리게 될 것입니다. 이는 오히려 20년간 반지하 주택이 더욱 슬럼화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유예기간은 '문제를 미루는 시간'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안을 구축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한 구체적인 로드맵과 연도별 예산 계획이 법안과 함께 제시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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